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제리 전쟁 (문단 편집) === 프랑스에 미친 영향 === 알제리 독립 전쟁은 [[프랑스군]]의 전력을 퇴보시켰다. 아무리 정예 기계화 부대라도 알제리에 일단 투입되면 그저 대게릴라전에 종사하는 보병이 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1958년에는 공군에서 병력 1만 명을 차출해 육군으로 전군시켜 알제리에 보냈을 정도였다. 그러고도 병력이 부족해서 예비역을 소집하고 현역병 복무기간을 27개월로 연장하기까지 했다. 프랑스의 인구구조를 보면 1920~40년대 전반기에 출생한 세대들이 적은 편이었는데 안 그래도 적은 이들을 데리고가니 전후 복구에서 상당한 지장을 주는 것은 당연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베이비붐 시절이라서 아이가 많았다는 점이 위안거리. 그리고 이 전쟁으로 기득권 기성 세대에 환멸을 느낀 청년층이 들고 일어나 [[68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2차대전의 [[프랑스 침공|6주 항복]]에 이어 베트남에서 지고 알제리에서까지 지는 3연타를 기록하면서 프랑스군의 '자존심과 실력이 반비례하는 프랑스'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결정타가 되었다. 독일에게 지고 식민지한테도 졌는데도 무슨 열강이냐는 것. 나치에게 진 것은 피해자 이미지라도 있지만 베트남/알제리 전쟁에서는 프랑스가 '패배한 가해자'가 되어 버렸다. 이후 프랑스군은 [[걸프 전쟁]]에 참전하여 실전도 치루고 전사자도 내면서 승리에 기여했지만 정작 전세계에는 '''"걸프전에 프랑스군도 실전에 참전했냐? 미국이 거의 주력을 다 맡지 않았냐?"'''는 인식만 뿌리박혀 있다. [[프랑스]]에서 좌우익의 견해가 가장 다른 것이 이 알제리 전쟁이다. 좌익들은 이 전쟁을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독립을 억누른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우익들은 이 전쟁을 "[[소련]]과 [[이집트]]를 위시한 아랍 국가들의 지원으로 발생한 자국 내의 중대한 반란"으로 취급하여 알제리의 독립운동 성격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일부 극우들은 아직도 알제리가 프랑스 땅이라고 주장한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이 거부해 왔던 공식적인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알제리에서 요구하는 학살 보상 및 핵실험 관련 문제와 같은 일은 보류하고 있기에 알제리에서는 반쪽도 안 되는 사과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프랑스 [[백인 우월주의]]자이며 극우정당 국민전선(FN) 총재인 [[장마리 르펜]]이 젊은 시절 육군 공수부대 장교로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던 바 있는데 당연히 학살을 부정하고 알제리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며 프랑스계 거주자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하라고 요구했다. 2009년 선거 당시 자신의 홈페이지에 알제리를 피로 물들이는 그림으로 대문을 장식했다가 알제리 여론의 반발을 불러오자 사르코지 정부는 알제리에서 반프랑스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피선거권을 박탈했다. 결국 2011년 정계에서 완전 은퇴하면서도 알제리를 내버린 프랑스를 따져가며 자기 잘못은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르펜의 딸인 [[마린 르펜]]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알제리는 프랑스의 영토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노리면서 알제리 및 북아프리카 이슬람 나라들의 교류를 위하여 일부 학살을 인정하고 알제리와 관계개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물론 알제리에서는 아버지를 따라 "그동안 알제리의 폭동, 프랑스 영토 알제리라고 하던 여자가 잘도 이제와서 일부 학살 인정에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다니 참으로 가소롭다"며 진정으로 사죄한다면 200만 학살 인정 및 보상을 하라고 맞설 뿐이다. 결국 알제리 학살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던 마크롱이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알제리에서 축하하며 반가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